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문단 편집) === 그 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F. D. Roosevelt.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barkersandrubes.files.wordpress.com/fdr.jpg|width=100%]]}}} || * 재임기 동안 [[대공황]], [[제2차 세계 대전]]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다보니 스트레스를 받아 취임 첫 해와 마지막 해[* 사망 직전]의 인상이 굉장히 달라졌다. 물론 대통령을 12년이나 했으니 자연스러운 노화 탓도 있다.[* [[버락 오바마]]의 경우에도 취임 당시와 퇴임 당시의 인상이 분명하게 차이가 난다.] * 1940년 어느 날, [[쿠바]]의 어떤 12세짜리 꼬마에게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를 쓴 꼬마가 영어가 하도 서툴러서 내용 이해도 힘들었던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편지 내용이 가관이었다. 그 편지에는 "10달러짜리 지폐를 본 적 없는데, 제가 볼 수 있게 해 줄 수 있나요?"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 그 꼬마의 이름은 [[피델 카스트로|]]였고, [[쿠바 혁명|훗날 쿠바를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렸다]]. 이 [[https://prologue.blogs.archives.gov/2014/09/26/fidel-castros-childhood-plea-to-president-roosevelt/|편지]]는 현재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 전시되어 있다. *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건조된 [[미드웨이급 항공모함]] 2번함(CV-42)에 그의 이름이 명명되었다. * 한 번은 감기에 걸려서 자리보전을 했는데 [[워싱턴 포스트]]가 이를 보도했다. 그런데 기사 제목을 'Roosevelt in Bed with Cold([[감기]]로 자리보전하는 루스벨트)'라고 적었어야 했던 것을 그만 'Roosevelt in Bed with Coed([[여대생]]과 [[불륜|동침한]] 루스벨트)[* co-education, 즉 '남녀공학'이란 뜻이고, 이 시절에는 대학 같은 고급 교육은 남자가 받는게 당연하다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보니 굳이 '남녀공학'이라 하면 여학생을 뜻했다. e와 l을 왜 헷갈리나 싶겠지만 필기체로 쓰면 두 글자는 필체에 따라 비슷해질 수 있다.]'라고 인쇄해 버렸다. 당연히 [[백악관]]은 난리가 났고 워싱턴포스트도 이 오류를 알고 즉각 수정에 나섰다. 이를 안 루스벨트는 워싱턴 포스트에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인데 초판 100부를 주실 수 없소? 제 친구 모두에게 한 부씩 보내고 싶어서..."'''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는 오보를 정정하고 초판은 이미 처분한 뒤였다고. 이 외 자신을 비판적으로 그린 풍자만화들을 수집해서 아예 휴양지나 백악관의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는 [[대인배]]스런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어떤 노골적인 풍자만화를 읽고는 그 만화에 '[[참 잘했어요]]' 정도의 의미인 '''grand'''라는 표시를 적어 놓았다고. * 젊은 시절부터 [[오크 섬의 보물]]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1909년 27세부터 보물인양회사에 합류해 직접 오크섬에 가서 작업을 했었고, 대통령 재직 중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졌으나 전쟁통에 빠진 세계 정세를 신경쓰느라 직접 가보진 못하고 종종 서신으로 소식을 듣곤 했다고 한다. 서신에 의하면 루스벨트는 그 곳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보물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편, 오크 섬의 보물 주인에 대한 여러가지 설 중엔 안 끼는 데가 없는 [[프리메이슨]] 관련 설도 있었는데, 프리메이슨 회원이라는 설도 있는 루스벨트가 찾지 못한 것을 보고 음모론자들은 보물이 프리메이슨과는 무관하거나 아님 프리메이슨도 그 존재를 잊은 것 아니냐고 생각했다고 한다. * [[뉴딜]]이 영국의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의외로 뉴딜 정책은 케인스주의로 인해 수립된 정책은 아니다. 당선 직후 루스벨트는 [[백악관]]에서 케인스를 직접 만나서 대화도 해봤지만,[* 당시 경제학자로 주가를 올리던 케인스가 뉴딜의 논리적 일관성을 보완해줄 수 있다고 봐서 측근이 주선한 자리였다고 한다.] 당시엔 균형재정을 지지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의 유효수요 위주 경제학에 대해서 "그 양반(케인스)은 정치경제학자라기보다는 수학자 같더구만!(“He must be a mathematician rather than a political economist”)"이라면서 그의 설명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고 한다. 뉴딜 정책은 이후 균형재정 목표가 후퇴하면서 진행된 것이었다.[[http://bloombury.tistory.com/entry/%EC%BC%80%EC%9D%B8%EC%A6%88%EC%9D%98-%EB%B6%88%ED%99%A9%EC%B2%98%EB%B0%A9|#]] 그러나 정책을 집행하는 도중 케인즈가 루즈벨트에게 몇차례 서한을 보내는 등 자문을 해주기도 했고, 미국 정책을 집행하는 재무부의 관료들 중에서도 케인지언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뉴딜 정책은 간접적으로나마 케인즈주의와 접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뉴딜 정책은 수요촉진, 사회보장제도, 인프라투자 등 케인즈주의와 상당히 궁합이 잘 맞는 정책이었고, 뉴딜 정책 이후 케인지언은 경제학계의 주류로 올라서게 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tatic.howstuffworks.com/russian-army-repels-hitlers-forces-31.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dailymail.co.uk/article-1158699-004704A100000258-792_468x366.jpg|width=100%]]}}} || * [[윈스턴 처칠]]과 죽이 잘 맞았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가장 유명한 일화가 처칠이 목욕한 후 알몸으로 있는데 루스벨트가 이를 보고 피하려고 하자 처칠이 "[[대영제국]]의 총리는 미합중국의 대통령께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 실제로 둘이 개인적인 '우정' 같은 감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서로 긴밀한 관계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20세기를 풍미한 두 거목이 배포가 잘 맞았던 셈. 허나 루스벨트와 처칠과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일단 처칠은 스스로 둘의 관계를 우정이라고 말하며 친근함을 자주 표현했지만, 루스벨트의 경우에는 처칠에 대해서 "하루에 수백 가지 생각은 하지만 그 중 쓸만한 생각은 열댓 개도 되지 못한다"라고 노골적인 디스를 날린 적도 있다. 그리고 둘은 몇몇 안건에 대해 의견 충돌도 잦았는데, 대표적인게 [[드골]]에 대한 인식 차이였다. 처칠은 드골을 프랑스의 유일한 지도자이자 희망이라고 생각하며 지지를 표명했지만, 루스벨트는 드골이 독재자가 될 인격을 갖추고 있기에 민주주의에 걸맞는 지도자가 아니라고 평가하며 사후 [[프랑스]]의 지도자 문제에 대해서 처칠과 다른 의견을 냈다. * 위의 드골에 대한 그의 인식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드골이 루스벨트와 동석한 자리에서 "하느님은 내게 프랑스 부흥이란 사명을 주셨다."라고 말하자 루스벨트는 혼잣말로 "거 참 이상하군. 난 그런 사명을 내린 적이 없는데..."라고 했다는 개그가 있다. * 그래도 프랑스에겐 고마운 대통령인지 [[파리 지하철 1호선]]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이름을 딴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역'이 있으며 거의 모든 역이 프랑스어인데 반해 영어로, 심지어 미국 대통령 이름으로 되어있어 꽤나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사실 대중교통 종류가 많고 지하철 역 또한 촘촘하게 짓는 일부 서구권 대도시의 경우 이런 식의 역명 명명법이 크게 특이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파리 1존의 경우에는 역 사이 거리가 짧으면 1분이 채 안될 정도로 많은 역이 모여있기에 지명과 전혀 관련없는 역명도 종종 존재한다. 예를 들어 7호선 중에는 [[스탈린그라드]]역도 있다.] 물론 안내방송은 프랑스어로 읽어준다. * [[얄타회담]]에서 조선독립시 미군정을 비롯한 상당 기간의 수습기간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한 적도 있었다. 자세한 건 [[미군정]] 및 [[신탁통치 오보사건]] 문서 참고. * 1920년대 시행된 미국의 [[금주법/미국|금주법]]을 폐지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금주법 자체가 당시 공화당이 주도한 법이다 보니, 당시 자본가들은 루스벨트의 친노동 정책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루스벨트를 지지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 [[미합중국 해군|해군]] 모의 훈련에 참가하였다가 난전에서나 나온다는 [[아군 오사]]를 당할 뻔 한 적이 있다. [youtube(v7Vcimrk2FA)] 정확히는 테헤란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아이오와급 전함]] 1번함 아이오와 함에 탑승 중 호위 함대의 훈련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플레처급 구축함]] [[https://brunch.co.kr/@skyraider/64|USS 윌리엄 D. 포터 함]] 측에서 모의 사격 훈련을 하다가 실수로 [[어뢰]]를 비우지 않고 대항군 역할을 하던 아이오와함을 향해 '''실탄 어뢰를 발사해버린 것'''. 이 때 루스벨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어뢰가 보고 싶다면서 더 잘보이는 자리로 휠체어를 옮겨달라고 했는데, 다행히 어뢰는 전함에 닿기 전 폭발했고 배가 대서양에 가라앉거나 루즈벨트가 물에 빠져 실종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포터 함의 승조원들은 조사를 받기는 했지만 사건을 재밌게 생각했는지, 루즈벨트가 최대한 개입해서 사고에 가깝게 만드는 바람에 책임을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어뢰 담당자 1명[* 뇌관을 해제하지 않아서 어뢰가 발사되게 만들었다. 상당히 중대한 직무태만이자 관리 소홀이다.]이 노역형에 처해진 것 외에는 아무도 불이익을 받지 않고 기적적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는 데 그쳤다. 그 대신 포터 함의 승조원들은 이후 다른 함선을 마주칠 때마다 '''"쏘지 마! 우린 공화당원이야!"'''라는 식의 놀림을 당해야 했다고 한다.[* 승조원들이 암살 혐의로 감금당했다느니, 아이오와가 포문을 돌렸다느니 하는 상당히 과장된 얘기들이 인터넷상에 널리 퍼져 있지만, 조사 기록이나 관계자들의 회고 등 실제 증거자료에 의하면 아무런 근거가 없는 호사가들의 낭설에 불과하다. ~~[[https://www.dogdrip.net/67735006|다만 그 만화가 재밌긴 하다.]]~~] * [[그 개새끼는 우리 개새끼]] 항목의 원조로 거론되기도 한다. 재임 시절 친미 성향 중남미 독재자인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소모사]]가 통치하던 [[니카라과]]와 외교 관계를 맺었는데, 이를 반대하던 비서관에게 "Somoza may be a son of a bitch, but he's our son of a bitch.(소모사는 개새끼일 수도 있지. 하지만 그 자식은 우리 개새끼야.)"라는 말을 남겼다는 설이 있기 때문. 다만 공식 문서가 없기 때문에 확실하진 않다. * 하반신 장애 때문에 티가 많이 나진 않지만, 저래 봬도 역대 미국 대통령 중 '''5번째로 장신'''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더 큰 사람도 나오겠지만 [[에이브러햄 링컨]](193cm), [[린든 B. 존슨]], [[도널드 트럼프]](192cm), [[토머스 제퍼슨]](190cm)에 이은 188cm. 다만 키가 같은 대통령은 꽤 있는데 [[조지 워싱턴]],[[체스터 A. 아서]], [[조지 H. W. 부시]], [[빌 클린턴]]이 그와 같은 장신이다. 이 때문에 한때 유행했던 2차 대전 추축국 지도자와 연합국 지도자의 키 비교 짤방을 보고 장신인 드골을 빼면 승패는 미궁으로 빠진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사실 그 짤방엔 루스벨트가 빠져있었다. 그의 먼 친척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키가 178cm였다. 당시 미국인 평균을 상회하는 키였지만, 미국 대통령 중에서는 작은 축에 들어간다고 한다. * FDR 사후 공화당에서 제출한 3선 금지 조항이 가결되면서 이후 미국 대통령은 강제적으로 2연임만 가능하게 되었는데, 특이 케이스로는 케네디 암살 이후 그의 2년 미만 임기를 대행하고 나서 다시 대통령 선거에서 이긴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있었다. 대행기간이 2년 미만인 경우에는 임기로 치지 않기 때문에, 린든 존슨은 다음 선거에 나와도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월남전 장기화로 반전여론이 거세지며 존슨 행정부도 타격을 받자 존슨 대통령은 스스로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후 리처드 닉슨이 3선 출마를 금지하는 조항을 없애려고 개헌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하야하며 개헌은 흐지부지된다. * 1936년 [[미국]] [[미시간]] 남동부에 위치한 도시 플린트에서 3,000여명의 [[노조]]원들이 GM공장을 점거하고 1달 넘게 연좌파업을 한 적이 있는데, 이때 경찰과 [[용역깡패]](구사대)들이 이들을 진압하려하자 루스벨트는 미시건 주지사와 연계해 [[주방위군]]을 파견해 노조원들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루스벨트는 노동자들이 불만을 제기할 권리가 있다고 봤기 때문었다. *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방탄차를 이용한 사람이다. [[진주만 공습]] 이후로 탑승했는데, 재미있는건 미국 대통령 첫 방탄차의 전 주인이 바로 [[마피아]] '''[[알 카포네]]'''였다는 것. 내막을 보면 알 카포네가 탈세 혐의로 감옥에 들어간 뒤, 대통령 경호를 겸하는 [[시크릿 서비스]]에서 그의 방탄차를 압수해두고 있었는데, 돈을 절약하고 싶었는지 어쨌는지[* 구 국군방송(현 국방TV)에서 방영했던 미국 다큐에 의하면 전시 상황으로 긴급히 방탄차를 장만하려고 해도 당시 법적 대통령 관용차 비용을 훌쩍 넘는 터라 도저히 장만할 수 없다보니 꺼내 쓴 거라고 한다.] 그냥 압수한 걸 대통령 방탄차로 활용해버렸다. 이걸 차 안에서 들은 루스벨트 왈, '''"카포네 씨도 이해해 주겠지."'''[* 비슷한 예로 한국 전쟁 당시 켈로 부대가 입은 나치의 [[무장친위대]] 위장 군복이 있다. 그 당시 미군은 워낙 급하게 한국에 와서 보급이 상당히 부족했었고, 2차 대전 중에 미군 측이 압수해둔 무장친위대 군복을 켈로부대원에게 지급했다. 이에 북한군과 중국군은 이 군복은 뭔가 하고 의문을 가졌는데, 여차저차해서 이 소식을 들은 (나치와 싸워본) 소련은 이 군복을 단번에 알아보았고, 때문에 왜 독일이 여기 참전했냐며 소련이 항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에어컨이 백악관 내부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루스벨트는 에어컨의 찬바람을 싫어했던 탓에 그의 재임시절에는 백악관의 에어컨을 한 번도 가동하지 않았다고 한다. * 당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자신도 반신불수로 만든 [[소아마비]] 박멸을 위해 소아마비 국립재단을 설립했다. * [[미네소타]]에서 처음 이겨 본 민주당 후보이다. * 1841년 고기 잡이를 하러갔다가 [[표류]]한 일본인 [[존 만지로]]를 구조한 포경선이 그의 외할아버지가 지분을 보유한 배였다. 그래서 루스벨트는 존 만지로가 죽은 뒤 1933년 존 만지로의 장남에게 당신의 아버지를 알고 있다고 한 통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https://fairhaventours.com/manjiro-nakahama/|#]] [[https://www.americanheritage.com/man-who-discovered-america#21|#]] *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와 함께 당시 대통령이었던 [[그로버 클리블랜드]]를 만나게 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인 프랭클린에게 덕담 한마디 해달라고 하자 클리블랜드가 한 말이 "얘야,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할 때 '하나님, 부디 절 대통령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하거라" 였다고 한다, 하지만 클리블랜드의 덕담과는 반대로 프랭클린은 대통령이 되었고,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의 기록을 세우며 역사에 굵직하게 남게 되었다. [[파일:루이 페르디난트와 프랭클린 루스벨트.jpg]] * 1932년 미국 대선 후보 시절에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의 손자들인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왕자와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를 만난적이 있다. 맨 왼쪽의 인물이 루이 페르디난트, 맨 오른쪽의 인물이 프리드리히 왕자다. * [[미들네임]]에 [[D(원피스)|D]]가 들어가있어 [[D의 의지]]가 실존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실제로 [[대공황|굵직]][[제2차 세계 대전|굵직]]한 사건들을 많이 겪었고, 무언가를 읽고 [[그랜드 라인|Grand]] 표시를 적어놓은 적도 있으며, 젊은 시절부터 [[라프텔|오크 섬]]의 [[원피스(원피스)|보물]]을 찾아다녔고 [[해군]]과도 연관이 있는 등 원피스와 관련지을 수 있는 부분이 많다.] * 참고로 그의 재임기간인 1933년 3월 부터 1945년 4월 까지인 12년은, 정말 우연히도 [[히틀러]] 가 독일 전체를 장악한뒤 나치 정권 시대 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히틀러가 사망하기 까지의 시기와 완벽히 일치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